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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우리 한국의 여러 개신교교단 중에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를 질문드립니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는 어떤

우리 한국의 여러 개신교교단 중에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를 질문드립니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는 어떤 교단이예요?     그리고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는 어떤 분께서 만들었는지......       정확한 내용으로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ai답변을 무단으로 복사붙이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재림 안식교 이단이 와서 답변을 하면 재림 안식교 이단의 답변을 채택하는 것은 재림 안식교 이단의 활동을 적극 돕는 것이 되니 이점 주의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이런 질문은 저나 질문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검색하여 알려 드립니다. 물론 교회사 읽을 때 다 나오기는 하지만 책을 볼 때마다 새롭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결교회와 나사렛교회와 오순절교회는 전부 미국의 19세기의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학적으로는 감리교의 웨슬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세군은 19세기에 영국의 감리교회에서 나왔으며 성결교회는 19세기에 미국의 감리교회에서 나왔습니다. 감리교회는 18세기에 영국 성공회에서 나왔습니다. 성공회는 16세기 초에 종교개혁 때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와 같이 나온 교파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大韓基督敎←Nazareth聖潔會 ]

요약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는 한국 기독교 내의 성결교단의 일파이다. 나사렛교회라고도 한다. 나사렛교회는 온전한 성결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만들어진 개신교파이다. 한국에서는 1907년부터 성결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1938년 일본 나사렛 교회의 지도 아래 장성옥이 평양에 나사렛교회를 개척했다. 1948년 미국 나사렛교회 감독 니스(O. J. Nease)가 와서 공식적으로 한국나사렛교회를 시작하였다. 나사렛성결교회의 교역자 양성기관인 천안의 나사렛신학교는 나사렛대학교로 교명을 바꿔 기독교 종합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정의

한국 기독교 내의 성결교단의 일파.

개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는 성결 전통에 속하는 개신교의 일파이며,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나사렛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1948년에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나사렛성결회는 웨슬리의 전통을 따라 성결을 강조하고 있으며, 천안에 나사렛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나사렛교회라고 불렸으나, 1974년 국제본부의 승인을 받아 한국에서는 나사렛성결회라고 부르고 있다.

설립배경

나사렛교회는 기존의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근본정신을 망각하고 세속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갱신함과 동시에 온전한 성결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만들어진 개신교파이며, 한국의 나사렛성결교회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한국의 나사렛성결교회의 뿌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33년 성결교회 목사가 된 장성옥은 나사렛교회로 옮겨 일본에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재일조선인나사렛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일본 나사렛교회는 1937년에 그를 한국으로 보내서 1938년 5월에 평양 신양리 나사렛교회를 개척하도록 했다. 당시 장성옥의 사역은 일본 나사렛교회의 지도 아래 있었다.

일본에서 온 장성옥의 활동 외에 이미 한국에서는 1907년부터 성결교회가 세워져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한국 교회의 자치문제를 놓고, 곽재근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그룹이 성결교회를 탈퇴하여 1936년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해방 후 이들은 오래 동안 미국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정남수에게 미국의 성결교파와 연결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고, 정남수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 나사렛교회와 접촉하여 한국에서 나사렛교회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1948년 미국 나사렛교회 감독 니스(O. J. Nease)는 정남수와 함께 한국에 와서 과거 하나님의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주축으로, 장성옥의 나사렛교회와 합하여 공식적으로 한국나사렛교회를 시작하였고, 정남수가 그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기간 동안에 정남수 목사는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면서 한국 나사렛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나사렛교회는 본격적으로 교단을 정비해 나갔고, 그 일차적인 과제는 나사렛교회에 속한 교회의 재산을 등록해서 하나의 법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정남수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과 겹쳐져1954년에 곽재근을 비롯한 하나님의 교회 출신 교역자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해 나가게 만들었다. 장성옥도 교도소선교를 위해서 나사렛교회를 사임하였다.

1954년 미국 나사렛교회 본부에서는 오웬스(Donald D. Owens)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한국 선교를 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결국 정남수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1956년 은퇴하였고, 한국 나사렛교회는 미국 선교사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웬스는 정남수가 쌓아 놓은 기반 위에서 나사렛교회를 발전시켰다.

1955년에는 정식으로 한국 지방총회가 조직되어 박기서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선출되어 운영되다가 1973년 지방총회 시대를 마감하고, 전국을 두 개의 연회로 나누었고, 그 후 두 개의 연회는 계속 발전하여 여러 개로 나뉘었다. 그러나 연회마다 감독이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므로, 이를 통합하기 위해 2002년 하나의 통합 총회를 구성해서 단일 감독을 선출하였고, 그 밑에 여러 지방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사렛성결교회의 교역자 양성기관인 나사렛신학교는 오래 동안 오웬스 선교사가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그 뒤 패취(William H. Patch) 선교사가 책임을 맡아서 운영하면서 교명을 나사렛대학교로 바꿔 교역자 양성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분야를 비롯하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 종합대학교로 발전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이 총장직을 맡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교단들이 발전함에 따라서 미국 본부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지만 나사렛교회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또한 미국 나사렛교단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해외선교, 신학교육, 대학발전, 출판 사업을 도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빌리 선데이 정남수목사』(김영백, 도서출판 나사로, 2002)

  • 「한국 나사렛교회의 형성사 연구」(강삼영, 『복음과 신학』3, 1998)

  • 「간추린 나사렛성결교회 60년사」(김영백, 『복음신문』2008.1.6.)

  •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大韓基督敎←Nazareth聖潔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na.or.kr/content/history

세계 나사렛교회의 역사

역사적 기독교와 웨슬리주의 성결의 유업

유일한 성경신앙

나사렛교회는 성결의 메시지에 대한 초유의 우주적 사도 교회의 일원임을 자인해 오면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의 를 다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동 교단은 신구약 성서에기록되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곧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 역사가 사도 시대에는 물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믿는다. '나사렛 사람'이라 함은 모든 시대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 받은 이 땅위의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된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런 뜻에서, 나사렛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 5세기 동안의 일현의 초교파적 기독교 신조들을 적절한 신앙의 표현들로 받아들인다. 나사렛교회는 완전성결의 교훈과 체험을 성례의 집행, 그리고 믿음과 행함의 동시적 강조를 통해 사도적인 사역을 육성하고 지속시키며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점에 있어서 사도적 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주의를 기울여 왔다.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 기독교 신앙은 과거의 여러가지 종교적 흐름 가운데 특히 18세기 웨슬레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우리 나라렛 교인들에게 전해져 왔다. 1730년대에 들어서면서영국 내에서 넓은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주로 영국 교회의 성직자였던 요한 웨슬레와 그의 형제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의 지도하에 생겨났다. 그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이 부흥 운동의 특징으로서, 평신도들의 복음 전파, 간증, 훈육, 그리고 열심 있는 제자들의 각종 모임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societies','classes', 'bands'등이 있었다. 영적 부흥 운동의 효시들로는 독일 경건주의와 그 창시자라고 할만한 야곱 스페너(Jacob Spener),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목회자이면서 신학자인 요나단 에드위즈(Jonathan Edwards)를 중심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각성 운동을 들 수 있다.

웨슬레의 위대한 부흥 운동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크게 세가지로 특징을 지을 수 있는데. 믿음안에서 은혜로 거듭나는 거듭남, 역시 믿음안에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결, 그리고 은혜의 확증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바로 그 것이다. 요한 웨슬레의 고유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서 이 땅위에서의 완전 성결에 대한 강조점을 들 수 있는데, 웨슬레는 이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해 준비한 은혜로운 계획 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러한 웨슬레의 신학적 강조점들이 영국 감리 교회의 초기 선교활동 에 의해 세계 전역에 퍼져 나가기에 시작했다. 북미대륙에는 "대륙을 개혁하고 대륙 온 땅에 성경이 가르치는 성결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명백한 목적을 띠고 1784년 영국 성공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의 성결운동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강조하는 새로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미국 동부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감리교 성직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지침서"(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의 최초 편집자인 디모데 메릿트(Timothy Merritt)가 성결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뉴욕의 포베 파머(Phoebe Palmer)로서, 그녀는 성결 운동의 촉진을 위한 화요일 기도 모임의 인도자였다. 그런데 감리교 감독들과 교육가들, 그리고 다른 많은 교역자들이 성결의 체험을 갈망하며 최초의 여성 집회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도 모임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파머 여사는 무려 40여 년간이나 대중 집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각종 저서의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특별히 "성결의 지침서"(Guide to Holiness)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책의 편집인 역할을 맡아 성결 운동을 더욱 확산시켜 갔다.

성결 운동은 감리교의 테두리 밖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찰스 지피니(Charles G. Finney)와 아사 마한(Asa Mahan)은 둘 다 오벌린(Oberlin) 대학 출신으로서, 당시 부흥 강사였던 윌리엄 보드맨(William Boardman)처럼 장로교와 회중교단 내에서 새롭게 성결을 강조하고 나섰다. 침례교 부흥 강사인 에이. 비. 얼(A. B. Earle)은 자신이 속한 교단 내에서 성결 운동을 지도하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나 위톨(Hannah Whitall)은 퀘이커 교도이면서 또한 인기 있는 성결운동가로서 1875년에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The christian's Secret of a Happy Life)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오늘날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고전이 되다시피 하였다. 1867년에 감리교회의 목사인 존 에이 우드(John A. Wood)와 존 인스킵(John Inskip) 그리고 그 외 몇몇 사람들이 뉴저지 주의 바인랜드(Vineland)에서 처음으로 연속 전국 캠프 집회 연합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주로 전국 성결 연합회(현재는그리스도인 성결 연합회)로 알려져 왔다.

20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이 연합회는 미국 전역에서 실시되는 각종 성결 운동을 후원하였다. 이에 따라 각 지역 및 지방 단위의 성결 연합회들이 출현하였고, 성결 교단의 주요 출판사들이 각종 간행물과 서적들을 앞 다투어 출판하였다.

성결 운동을 주창한 자들의 주장은 웨슬레 감리교회(1843)와 자유 감리교회(1860), 그리고 영국의 구세군(1865) 등을 창설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880년대에는 독특한 신생 성결 교단들이 출현하였는데 인디아나의 앤더슨(Anderson) 파로 분류되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결교(Holiness) 파로 분류되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 외 기존의 오래 된 전통 교단들도 성결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완전성결에 관한 한 웨슬레의 성결론을 채택한 메노나이트파(Mennonites)와, 형제 교회(Brethren), 그리고 동료애를 표방하는 프렌드교회(Friends) 등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교회의 형제파(Brethren)와 복음주의 프렌드 동맹(Evangelical Friends Alliance)은 이른바 영적 전통의 혁신을 가져온 본보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그룹연합

1890년대에는 새로운 조류의 독립 성결 단체들이 일어났는데 독립 교회들과 도시선교 단체, 가정 구호단(rescue homes), 그리고 각종 선교 및 전도 협의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전국 규모의 성결교회로 연합하기를 소원하였으며, 이 일이 동기가 되어 현재의 나사렛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The association of Pentecostal Church of America)

1897년 7월 21일 회원 51명에 힐러리(F. A. Hillery) 목사를 목회자로 하는 민중 복음 교회(People's Evangelical Church)가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주에서 조직되었다. 그 이듬해 메사추세스(Massachusetts) 주의 린(Lynn)에서 데이비스(C. Howard Davis) 목사를 목회자로 하여 선교 교회(Mission Church)가 조직되었다.

1890년 1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이 교회 대표들과 다른 독립 성결 단체들의 대표들이 메사추세스 주의 록(Rock)에 모여 로드아일랜드와 뉴햄프셔(New Hampshire), 그리고 메사추세스 주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복음주의 중앙 성결 연합회(Central Evangelical Holiness Association)를 조직하였다.

1894년 1월에는 사업가 후플(W. H. Hoople)이 브룩쿨린 전도단(Brooklyn mission)을 설치하였는데, 그 이듬해 5월에 유티카 애비뉴 오순절 성막 교회(Utica Avenue Pentecostal Tabernacle)로 재조직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 연말까지는 벳포오드 애비뉴 오순절 교회(Bedford Avenue Pentecostal Church)와 임마누엘 오순절 성막 교회가 조직되었다. 1895년 12월에는 이들 세 교회의 대표들이 교회 헌법을 채택하고 교회의 개요와 부칙 등을 채택하여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를 형성하였다. 1896년 11월 12일에 뉴욕 브룩클린 시에서 복음주의 중앙 성결 연합회(the Central Evangelical Holiness Association)와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의 합동 위원회가 소집되어 통합 계획을 모색하였고 그 통합 단체명은 그대로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라 하기로 합의했다. 이 연합회의 주요 인사들로는 레이놀즈(Hiram F. Reynolds), 호슬레(H. B. Hosley), 데이비스(C. Howard Davis), 후플(William Howard Hoople), 그리고 보다 후기에 참여한 엔겔(E. E. Angell) 등이 있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원래 평신도 설교가들이었으나 후에 교회의 요청에 따라 목사로 안수를 받기도 하였다. 이 연합회의 결정적인 임무는 선교하는 일이었으며, 선교 총무였던 레이놀즈(Hiram F. Reynolds)의 지도 하에 인도의 케이프 버데 아일랜드(Cape Verde Islands)와 여러 다른 지역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희망찬 포부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뷸라 크리스천(The Beulah Christian)이라는 책자를 협회의 공식 간행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of Christ)

1894년 7월에 테네시(Tennessee) 주의 밀란(Milan)이라는 곳에서 해리스(R. L. Harris) 목사가 임종 직전에 신약 그리스도의 교회(New Testament Church of Christ)를 조직하였다. 그 후 해리스(R. L. Harris) 목사의 미망인이었던 케이글(Mary Lee Cagle) 여사가 남편의 일을 계속 하였으며 동 교단의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엄격히 말해서 이 교회는 정치 형태로는 회중 교회로써 알칸산스(Arkansas) 주와 텍사스(Texas) 주 서북 지역에 두루 퍼져있었고, 교인들은 주로 알라바마(Alabama) 주와 미주리(Missouri) 주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케이글(Mary Cagle) 여사와 그녀의 협력자 쉭스(E. J. Sheeks) 여사는 1899년에 최초의 안수 후보자들 가운데 섞여 안수를 받았다.

1888년에 들어서면서 텍사스에는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에서 온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 목사와 데니스 로저스(Dennis Rogers) 목사에 의하여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라는 이름을 가진 소수 회중의 교회들이 조직되었다.

1901년 저니간(Charles B. Jernigan) 목사에 의하여 텍사스 주 반알스타인(VanAlstyne)에 최초의 독립 성결교회(Independent Holiness Church)가 조직되었으며, 창립 초기부터 체프만(James B. Chapman) 목사가 이 교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교단은 빠른 속도로 부흥 발전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데니스 로저스 목사가 이끈 교회들이 독립 성결교회에 가입하였다. 이윽고 1904년 11월에는 그리스도 신약 교회와 독립 성결교회의 대표들이 텍사스 주의 라이싱 스타(Rising Star)에 모여 통합 원칙에 합의하였으며 장정을 제정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성결교회(Holiness Church of Christ)라는 교단 명칭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통합은 그 이듬해 텍사스 주의 파일럿 포인트(Pilot Point)에서 열린 중앙 대표 협의회에서 완성을 보았다. 아울러 공식 간행물"성결의 복음"(The Holiness Evangel)을 교단의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그 외 교단 내의 대표 교역자들로는 피셔(William E. Fisher), 스캇(J. D. Scott), 업처치(J. T. Upchurch)를 들 수 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로는 쉭스(Edwin H. Sheeks), 알 밋첨(R. B. Mitchum), 다니 밋첨(Donie Mitchum)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의 교단 내의 여러 지도자들은 텍사스 성결 연합회(the Holiness Association of Texas)에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텍사스 주 그린빌(Greenville)에 인접한 브니엘(Peniel) 대학을 후원하기 위한 초교파 단체였다.

그 연합회는 또한 남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성결 운동 홍보지인 '오순절 대변자'(Pentecostal Advocate)를 후원하였는데, 그것은 1910년에 나사렛 교단의 기관지가 되었다. 그 연합회의 주요 인물들로는 디저넷(E. C. DeJernett) 목사와 평신도였던 맥코넬(C. A. McConnell) 씨를 들 수 있다.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

1895년 10월에 브릿지(Phineas F. Bresee) 목사와 의사였던 위드니(Joseph P. Widney) 씨가 각각 자신들의 가족과 볼드윈(Alice P. Baldwin), 개이(Leslie F. Gay), 놋트 부처(W. S. and Lucy P. Knott), 맥키(C. E. McKee) 씨 등을 포함하여 약 100명으로 구성된 나사렛성결교회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조직하였다. 표면적인 견지에서 그들은 이 교회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완전성결의 실재를 전파하는 최초의 교단임을 천명하였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성결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 스스로 특별히 이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배 처소에 대한 불필요한 단장이나 장식물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대변하지 못하며 오히려 세속적인 생각을 반영한다고 보았으며, 자신들의 시간과 물질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위한 구제 사역을 위해 소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 같은 취지 하에서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일반 규약과 신조, 제한적 감독권에 기초한 치리, 집사 임명 절차 및 목사안수 과정 그리고 예식 절차 등을 채택하였으며, 이를 1898년 초에 교회 장정으로 출판하였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The Nazarene)이라는 간행지를 발간하였고 후에 '나사렛 사절'(The Nazarene Messenger)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나사렛성결교회는 주로 서부 해안을 끼고 퍼져 나갔는데 로키 산맥의 동부로부터 일리노이(Illinois) 주에 이르기까지 각 곳에 교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새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한 목사들 가운데는 브라운(H. D. Brown), 셰퍼드(W. E. Shepard), 루쓰(C. W. Ruth), 켄트(L. B. Kent), 라이드(Isaiah Reid), 크레이턴(J. B. Creighton), 코넬(C. E. Cornell), 피어스(Robert Pierce), 그리고 윌슨(W. C. Wilson) 등이 있다. 그리고 새 교회에서 처음으로 안수 받은 이들로는 위드니(Joseph P. Widney), 웰레이스 부처(Elsie and DeLance Wallace), 놋트(Lucy P. Knott) 그리고 걸빈(E. A. Girvin) 등이다. 브리스(Phineas F. Bresee) 목사는 38년간의 다양한 목회경력, 즉 목회자, 감독, 편집자, 대학이사 그리고 감리교 캠프 집회의 설교자로서의 경험과 사람을 끄는 그의 독특한 인품때문에 여러 성결 교단들을 국가적 규모의 단체로 통합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통합년도

1907 -1908. 나사렛성결교회의 부 중앙감독으로서 웨슬리안 계통의 성결 운동 단체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쌓아온 루쓰(C. W. Ruth) 목사에 의하여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The Association of Pentecostal Churches of America)와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 그리고 그리스도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of Christ)가 서로 연합하게 되었다.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와 나사렛성결교회 대표들이 1907년 10월 10일-17일까지 시카고에서 중앙총회를 가졌는데, 두 그룹의 대표들은 감독의 권한과 개교회의 독립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교회의 치리 형태에 합의를 보았다. 감독들은 기존 교회를 육성하고 격려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권한은 결코 자립 교회의 의결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중앙총회는 양 단체의 이름을 따서 통합 교단의 명칭을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The Pentecostal Church of the Nazarene)라고 하였다.

초대 중앙감독으로는 브릿지(Phineas F. Bresee) 목사와 레이놀즈(Hiram F. Reynolds) 목사가 피선되었으며, 그리스도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연회의 업무에 시종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또 다른 두 건의 교단 가입이 있었다. 1908년 4월에는 브릿지(P. F. Bresee) 목사가 텍사스 주의 브니엘(Peniel)에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를 조직하여 텍사스 성결 연합외의 주요 인물들을 그리로 인도함으로써 다른 교인들로 하여금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9월에는 그리스도인 성결교회(the Holiness Christian Church)의 펜실베이니아 연회가 해당 교단의 중앙총회의 승인 하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트럼보(H. G. Trumbaur) 목사의 인도 하에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였다.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의 제2차 중앙총회는 텍사스 주 파일럿 포인트(Pilot Point, Tex)에서 1908년 10월 8일 -14일까지 그리스도 성결교회의 중앙 협의회와 연합 회의로 모였다. 양자간의 오랜 통합 준비 기간이 "두 교회의 통합을 이제 완성하기로 하자는 밋첨(R. B. Mitchum)의 동의안에 대해 루쓰(C. W. Ruth)가 제청함으로써 10월 13일 토요일 오전에 종결되었다.

또한 여러 사람이 동의안에 찬성하였다. 브릿지(Phineas Bresee) 목사는 이 동의안의 가결을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오전 10시 40분경에 열의에 찬 분위기 하에 만장일치의 거수투표로 채택되었다.

교단 이름 변경

1919년 중앙총회는 35개 지방 총회의 청원에 따라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성결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라고 공식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Pentecostal)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의미들 때문이었다.

추가가입

1908년 이후 여러 다른 단체들이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게 되었다.

오순절 선교회(The Pentecostal Mission)

1898년 컴벌랜드(Cumberland) 장로교의 부흥사인 맥클라칸(J. O. McClurkan)이 테네시 주와 인접한 주에서 온 성결교인들을 한데 묶어 '오순절 동맹'(Pentecostal Alliance)이라는 연합체를 내쉬빌(Nashville)에서 조직하였다.

이 연합체는 선교정신에 불타 목회자들과 교사들을 쿠바(Cuba), 과테말라(Guatemala), 멕시코(Mexico), 인도(India) 등지에 파송하였다. 맥클러칸(McClurkan)은 1914년에 별세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후에 오순절 선교회로 명명된 그의 그룹이 오순절 나사렛 교회와의 통합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 of Scotland)

1906년 글라스코(Glasgow) 시에 있는 파크헤드 회중 교회(Parkhead Congregational Church)의 샤프(George Sharpe) 목사는 웨슬레의 성결 교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목회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떠난 20명의 교인들이 즉시 파크헤드 오순절 교회(Parkhead Pentecostal Church)를 세웠으며, 이와 함께 다른 교회들도 조직되어, 그들이 1909년 스코틀랜드 오순절 교회를 세웠다. 이 교단 역시 1915년 11월에 오순절 나사렛성결교회와 통합을 이루었다.

평신도 성결연합회(The Laymen's Holiness Association)

평신도 성결 연합회는 1917년 다코타(Dakota) 주 북부 지역의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댄포드(S. A. Danford)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이는 다코타(Dakotas)와 미네소타(Minnesota) 및 몬타나(Montana) 주 지역에서 웨슬리안 성결 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함이었다. 이 그룹은 '성결의 평신도'(The Holiness Layman)라는 간행지를 발간하였다. 모리슨(J. G. Morrison)목사는 1919년에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다른 25명 이상의 부흥사 및 사역자들과 함께 연합회를 이끌어갔다. 1922년 모리슨 박사를 위시로 한 대부분의 사역자들과 무려 1000명 이상의 교인들이 함께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였다.

헵지바 신앙 선교연합회(Hephzibah Faith Missionary Association)

아이오와(Iowa) 주 타볼(Tabor)을 중심으로 한 이 선교 연합회는 1893년 위버쓰(Elder George Weavers)에 의하여 조직되었는데 그 후 6개국 이상에 80명이 넘는 사역자들을 파송하였다. 1950년에 이르러 이 연합회의 타볼(Tabor)지역 회중들과 남아프리카 선교 및 다른 지역의 회중들이 나사렛성결교회와 연합하였다. 성결교회와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약 22개의 교회와 600명 이상의 교인들이 나사렛 성결교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국제성결 선교회(IHM)와 갈보리 성결교회(CHC)가 가입하게 된 것은 당시 나사렛 교회의 지방 감독이었던 프레임(George Frame) 목사의 이상과 공로에 의해 이루어졌다.

캐나다 복음 사역자 교회(Gospel Workers Church of Canada)

1918년 온타리오(Ontario)의 고프(Frank Goff)에 의해 조직된 이 교회는 초창기에 소위 '성결의 사역자들'(Holiness Workers)이라고 불리던 그룹에서 유래하였다. 그 교회는 1958년 9월 7일에 나사렛성결교회와 통합을 이루었는데 이로써 5개의 교회와 약 200명의 회원이 캐나다 중부 연회에 추가 가입되었다.

나사렛성결교회 - 나이제리아(Church of the Nazarene- Nigeria)

1940년대에 나이제리아에 웨슬리안 성결 교단(Wesleyan-holiness church)의 한 교회가 토착민의 지도 하에 조직되었다. 그 교회는 국제 나사렛성결교회의 장정에 언급된 교리와 명칭 등을 부분적으로 적용시키면서 나사렛성결교회라는 이름을 채택하였다. 에카이뎀(Jeremiah U. Ekaidem)의 지도 하에 1988년 4월 3일에 나사렛성결교회와 정식으로 연합하였다. 이로써 39개의 교회와 6, 500명의 회원을 가진 새 연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화 교회로 지향

나사렛교회는 처음부터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시작되었다. 1908년 연합 총회를 발단으로 나사렛 교인들은 북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멕시코 케이프 버데 아일랜드, 인도, 일본,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19세기 선교운동의 증인으로써 현재의 나사렛 교단을 형성한 각종 기독교 단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세계 각곳으로의 확장은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에 의하여 1898년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오순절교회는 1900년에 남아프리카 에서 활약하였다. 아프리카에서 1907년에 활동하였던 나사렛 교인들은 후에 교단 선교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1945년에는 호주 및 남태평양(AUstralia-South Pacific)으로, 그리고 1948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기 시작 했는데 이경우 나사렛교회는 이미 웨슬리안 성결 교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던 개교회의 목회자들인 호주의 버그(A.A.E.Berg) 목사와 이탈리아의 로소(Alfredo delRosso)목사와의 제휴를 통하여 선교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교단의 활동을 이처럼 세계적으로 발전시킨는데 있어서 나사렛교회는 역사적으로 피선교국 내의 사역자들의 힘에 의존해 왔다 그들은 개교회에서의 은혜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선교사역에 혀력하였다 1918년에 인도의 한 선교사는 3명의 자국인 설교자와 4며의 교사, 그리고 3명의 사서와 5명의 성1936년까지의 나사렛 교단 내의 자국민 사역자와 선교지역은 모두 138개국에 달한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이 자국의 문화적 토양에 걸맞은 방법으로 나사렛교회를 토착화 함으로써 각국의 정체성을 서로 연결시키는 모자이크 관을 만들어 국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다.

국제적인 활동의 독특성

오래전부터 나사렛 교단의 국제적인 활동에는 전교사역과 구제사역 그리고 교육활동이 그 중심을 이루웠다 적극적인 전도 사역의 실례로는 쉬멜젠바흐(H.F. Schmelzenbach)와 트레이시(L.S. Tracy), 위난스(Esther Carson Winans), 그리고 크리코리안 (Krikorian) 등을 들 수 있는데 그외에도 전도 사역의 상징처럼 불리는 낳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역시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나사렛교회와 신하 연회들은 계속하여 복음 전파와 그로 말미암아 부흥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의 나사렛 구제 사역은 일찍이 인도의 기근 당사자 들에 대한 구제와 또한 고아를 돌보는 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활동은 1920년대 초기에 중국 타밍푸( Tammingfu)에 브릿지 기념병원(Bresee Memorial Hospital)을 세우기위해 조직된 의료선교협의회(Medical missionary Union)에 의해 보강되었다. 교단내의 의료사업은 주로 스와질란드(Swazilrand)에서 개발, 확장되었고 각각 다른형태의 구제사역들이 세계전역에 발전되어왔다.

교육이야말로 나사렛교회의 국제적인 사역의 일면을 제공한다. 일찌기 1905년에 캘커타(Calcutta)에서 바나지(Sukhoda Banarji)에 의해 창설되고 그 다음해 나사렛 성결교회가 인수한 소녀들을 위한 희망보육원( Hope Shcool for Girl) 이 그 실례이다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외 지역의 나사렛 교인들은 기본적인 교육과 구체적인 목회 사역을 위한 훈련에 필요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미국과 필리핀에 있는 두 곳의 대학원 외에 미국과 아프리카, 한국에는 여러 개의 일반대학이 있으며, 일본에는 단과 대학이 파푸아뉴기니, 그리고 인도에는 각각 간호학교가 있으며, 나사렛교회는 이처럼 선교사역이 구성 요소들이 활발히 발전해감에 따라 눈부신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2001년 현재 나사렛교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2,600여 교회에 속한 정회원 1,390,306명 규모의 단일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 오늘의 교단은 단지 믿음안에서 국제적인 참여"를 추쿠하는 교단의 범주에서 벗어나 실제로"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로서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1976년 중앙총회에서는 국제화 위원회(Commission on Internationalization)를 두기로 결의하였으며, 아울러 동의원회는 1980년 중앙총회의 보고를 통해 세계를 지역 단위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각 지역의 경계 및 그 수는 이후로 자주 변경되어 왔는데, 현재는 아프리카-태평양 지역 캐나다 지역, 캐리비안 지역, 유라시아 지역, 멕시코 - 중앙아메리카 지역, 남아메리카 지역, 그리고 미국 내의 8개 지역들이 있다.//

한국 나사렛교회 역사

나사렛교회의 기원과 창시자

우리는 나사렛교회의 구성원으로 60여 년 간을 지나온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나사렛교회가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쫓는 복음주의에 속하였고 또한 성서의 핵심 교리인 온전한 성결을 강조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선교적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나사렛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자랑이기도 하다.

나사렛교회란 나사렛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마 2:23). 예수를 믿고 따르는 나사렛사람들은 예수의 인격을 닮고 그의 가르침과 삶을 본 받아 성실하게 거룩을 추구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시자 브리지 박사는 나사렛교회를 아침에 솟는 태양으로 비유하였다. 21세기는 아침의 교단인 나사렛교회가 그 주역의 일부분을 담당하리라 믿으면서 자랑스런 나사렛사람들의 공동체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사렛교회의 역사와 창시자들

미국에서 출발한 나사렛교회

나사렛교회는 1908년10월 8일에 미국 택사스주 파이롯 포인트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 말엽부터 불기 시작한 성결 부흥운동이 마침내 미국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 여파로

1)동부에서는 뉴욕을 중심으로 규합한 세력들이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1896,11,12) 를 형성하였다.

2)남부에서는 택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결교회(1904, 11) 가 조직되었으며

3)서부에서는 로스엔젤스를 중심으로 P. F. 브리지 목사를 지도자로 한 나사렛교회(1895,10)

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1907년 10월 10-17일까지 시카고에 모여 우선 동부의 오순절교회 연합회와 서부의 나사렛교회가 통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서적인 성결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의 교단으로 손을 잡고 오순절 나사렛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남부의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은 시종 방청객으로 참석하였다가 이듬해인 1908년 10월8-14일까지 택사스 파이롯 포인트에서 오순절 나사렛교회 대표들과 같이 총회를 열고 대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나사렛교회는 미국의 전역을 망라한 전국적인 교단으로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창기 나사렛교회는 피니스 F. 브리지(Fhineas F. Bresee), 씨. 비. 저니간(C. B. Jernigan), 씨. 더블류. 루스(C. W. Ruth)

그리고 에이취. 에 프. 레이놀스(H. F. Reynolds), 이. 피. 엘리슨(E. P. Ellyson) 목사등이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초창기 지도자들이 함께 갖았던 꿈은 웨슬리주의 전통안에서 믿는 자들의 성결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도모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후 1919년 총회에서는 35개 연회의 청원을 받아드려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교회라고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교단과 선교단체들 특히 영국과 카나다의 성결교회들이 가입하여 성결교단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었고 현재 전세계 164개 국가에서 강력한 성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나사렛교회

*일본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1905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있 었는데 교단이 1908년에 오순절 나사렛교회와 합동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나사렛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나사렛교회의 역사는 미국 나사렛교회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나사렛교회는 1936년 동부연회 조선부에서 오사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장성옥(張聖玉)목사를 평양 신양리에 파송하여 최초의 나사렛교회를 한국에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울 영천에 또 하나의 나사렛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성결교회 제3차 총회가 1935년에 분열되자 거기서 이탈한 인사들이 1936년 11월 25-29일 까지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창립총회를 열고 "하나님의 교회 선언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홍파동에 김승일 전도사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교회가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개의 성결구룹들이 1948년 4월 사직동에 있는 정남수 목사 댁에서 미국의 나사렛 교회에 가입하여 이 땅에 진정한 성결 복음을 전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대한기독교 성교회(聖敎會)의 창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0월에 국제본부 극동담당 감독인 니스 박사가 중

앙위원회의 위임을 받고 내한하여 필동교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정식으로 한국 나사렛교회를 인정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조직을 보면 이사장에 정남수 목사, 총무에 서재철 목사, 재무에 안형주 목사, 신학교 책임자에 곽재근 목사, 서기에 승학수 목사 등이었다.

그 후에 한국 동란이 일어났고 많은 교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이 와중에 영천교회 담임목사인 승학수 목사 가족이 폭격으로 화를 입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정남수 목사는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 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많은 구제품과 선교 자금을 모금하여 어려운 교역자들과 교인들을 도왔고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4년 5월에 국제본부에서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로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오은수)를 파송하였고 서울 사직동에 건물을 매입하여 교단본부와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1954년 9월 14일에 그 자리에서 23명의 학생으로 한국 나사렛신학원을 개강하고 초대원장에 취임하여 사역자 양성에 들어 갔다. 그것이 오늘의 나사렛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교단은 1955년 5월에 영천교회에서 11개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개회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정식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감독에 박기서 목사, 총무에 조문경 목사, 재무에 김종수 목사가 취임하였다.

현재의 교세는 5개 연회에 250여 개교회 그리고 4만여명의 신도들이 나사렛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필리핀, 카자흐스탄, 타이완, 일본, 이태리, 오스트라리아, 중국, 애급에 1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나사렛교회를 창설한 두 주역

나사렛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피니스 F. 브리지(Phineas F. Bresee) 박사와 한국에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정남수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열렬한 성결 부흥사라는 점과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가라는 점과 교단을 창립하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국제 나사렛교회의 창시자로 또 한 사람은 한국 나사렛교회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브리지 박사(Dr. B. F. Bresee,1838-1917 )

그는 1838년 뉴욕 프랭클린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아이오와로 이사하여 2년 뒤에 감리교 시골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후 25년간 이 지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으며 감리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광산업에 손을 댄 것이 실패하여 목회를 그만두고 1883년 칼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우연히 몇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회하던 중 그는 성결운동의 지도자였던 왓슨(George D. Watson)과 맥도날드(William McDonald)의 성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확실한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결운동의 일원으로서 전국성결연합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캘리포니아 지역의 성결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런 브리지의 열정적인 성결운동은 감독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브리지는 빚더미에 쌓인 조그만 시골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몇 차례의 이런 부당한 파송을 받게 된 브리지는 결국 1894년에 감리교회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잠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브니엘선교회(Peniel Mission)에서 일하다가 의사이자 목사였으며 남가주대학교의 전직 총장인 위드니 박사(Dr. J. P. Widney)와 함께 1895년에 로스엔젤스에 나사렛교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이 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나사렛교회가 남부지역, 동부지역의 성결단체와 연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의 나사렛교회를 형성하고 1908년에 초대 감독에 레이놀드 목사, 엘리슨 목사와 함께 선출되었다.

브리지가 지도하는 나사렛교회는 기존의 감리교회에서 성결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자 성결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초기 감리교회가 가졌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다. 19세기 말의 미국 사회는 도시화된 사회였고 따라서 수많은 도시 빈민문제가 발생하였다. 브리지 박사의 나사렛교회는 특별히 이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나사렛이라는 말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성결파 단체들은 그들의 분리 이유에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집회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 양로원, 긴급구조대 같은 것을 운영하였다. 즉 성결의 강조는 사회 개혁운동과 함께 나갔던 것이다. 브리지 감독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명을 다하고 1917년 월 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긴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을 마감하였다.

정남수 목사 (1895-1965)

그는 1895년 11월 9일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정용훈씨의 3남1여 중 막내로 태어 났다.

1907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다음 해에 안창호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도산선생이 일경에 피검되어 경성에 압송됨에 따라 상경하여 옥중에 있는 도산의 사식차입과 외부의 독립운동가 들과의 영락을 담당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0년 도산이 석방과 함께 미국 방명 길에 오르자 그와 동행하여 중국 청도와 러시아의 모스코바와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 뉴욕을 거쳐 로스엔젤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자 그 창립 단원이 되었고 그 후 독립자금 모금과 도산선생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25년에 에즈베리신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각처 천막부흥회에서 설교, 한국의 빌리 썬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26년에 감리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탠리 죤스 박사의 권유와 천막전도집회에서의 원조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7년에 동경음악전문하교 출신의 김경숙 양과 결혼하였고 성결교회 장막전도대 대장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6천명 수용의 천막과 트럭 그리고 7인조 악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를 비롯해서 만주 일대에 선풍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그를 가리켜 한국 부흥운동사에 있어서 제3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셩결교회 최고 이사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임명되어 교단 발전에 기여하였고 부흥전도집회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월간지 "성화"를 발간하였으며 설교집을 2권 발행 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반일 친미주의자로 지목되어 트럭과 천막 악기등이 압수 당하고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룬 후에 석방되었으나 심한 고문으로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통으로 지났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그의 활동무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으니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에즈베리신학교 동창들이 요인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나사렛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에 순수한 성결단체인 나사렛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옛 동지들인 하나님의 교회 지도자들과 당시 영천에 있던 나사렛교회 그리고 홍파동의 독립교회를 합쳐 1948년 봄에 성교회(聖敎會)를 창설하였고 그 해 10월에 내한한 극동 담당 니스 감독에 의해 정식 나사렛교회로 공인을 받았다. 그 후에 6. 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교회 재건과 구호품 수집에 주력하였고 1952년에 귀국하여 교회 재건과 교역자들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국제본부에 신학교 설립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한편 재단 설립을 서두르며 교단의 모양 갖추기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오은수 목사 내외가 1954년 5 월에 입국하자 그는 자기의 임무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그 해 8울 20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은퇴를 선언하였다. 1965년 7월8일 불덩어리 부흥사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남수 목사가 심장질환으로 소천하니 향년 70세였고 유족으로는 부인과 3남 1녀를 남겼다.

정남수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시작하여 열렬한 성결 부흥사로 한국의 뭇 심령들을 일깨우고 마지막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그의 임무를 마친 위대한 지도자이다.

나사렛교회의 현황과 특색

나사렛교회의 현재 상황​

현재 나사렛교회는 세계적인 국제교회로서 가장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졌으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성결교회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 교세는 정회원수가 2백616,741이며 1년에 약 9만명의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고 교회수는 30,875개이고 164개 국가에 선교를 하고 있다. 59개의 고등 교육기관에 약 3만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고 100개의 구호기관과 700개의 선한 이웃 교회가 있다. 1년에 헌금액이 1997년을 기준으로 $586,908,906으로 집계되어 있다.

나사렛교회는 21세기를 맞아 아침의 교단답게 나사렛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배와 전도와 교육 그리고 봉사에 힘을 기우려 나갈 것이다. 참고로 1908년 창립총회 당시의 교세를 보면 교회수 288개, 정회원수 10,414명, 1907년의 총 헌금 수입액은 $106, 087이었다.

나사렛교회의 자랑스런 특징들

1. 예배

나사렛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며 어떤 틀에 짜인 의식과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잔치답게 감사와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를 선호한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풍성한 꼴로서의 영감있는 설교가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고 그리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경험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간증하는 일과 제단 초청으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특색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할 뿐더러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세상으로 파송되는 결단을 갖게 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아래서 응답되는 인간의 결단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야 말로 예배의 진수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인 예배라고 믿는다.

2. 나사렛교회가 힘 쓴 일들

A. 선교

초창기 교회는 교단 설립과 동시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나사렛교회가 공식으로 창설된 1908년에 이미 일본과 인도와 아프리카와 남미등에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교회마다 선교회가 조직되어 전 교인 선교사화를 꾀하며 "내가 가든지 남을 보내든지"라는 정신으로 선교사역에 힘을 경주하였다. 개교회 마다 조직되어 있는 국제선교회 (NMI)의 목적은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에 대해 교육하고, 선교에 헌신할 청소년들을 격려하며, 선교기금을 확보하여 선교사업을 돕는 일이다. 선교사는 직업선교사, 특수선교사, 단기선교사 또는 자원선교사로 구분한다. 요즘은 많은 교회에서 선교지 답사와 증거와 봉사 팀(Work and Witness Team)을 만들어 직접 선교를 체험하게 하는 일이 많다. 나사렛교회

가 실시하고 있는 "옥합성금" 운동은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금으로 선교지에 부동산 구입과 교회당, 학교, 병원, 선교사 주택, 목사관 건축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간에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현재 선교사의 수는 600명이 넘는다.

B. 교육

교단 창립자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한 선각자들이었다. 사역자 양성을 위한 성서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일반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들을 설립하였다. 현재 미국에 있는 대학들의 창립연대가 교단의 창립일자와 거의 비슷한 것은 볼 수 있는데 이는 교회를 세우면서 동시에 대학을 세웠다는 뜻이 된다. 나사렛교회는 현재 미국에 1개의 신학대학원과 성서대학 그리고 8개의 인문 대학교가 있고 각 나라마다 신학대학과 기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전 세계에 나사렛 고등교육기관으로 59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나라에는 간호대학과 교육대학이 설립되어 그 지역에 봉사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들을 관리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제본부에 일명 IBOE로 알려진 국제 교육위원회(International Board Of Education)가 있으며 개교회의 주일학교를 통한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장년들의 교육을 총괄하는 주일학교국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의 전도와 청지기 훈련과 제자교육을 위해서 교회성장국이 있다. 교육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여는 대문과 같다.

c. 출판

1908년에 교단이 발족하면서 본부 안에 인쇄시설을 갖춘 나사렛출판사를 설립하여 기관지와 전도지 그리고 각종 교재와 신학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인쇄물을 통한 복음전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늘의 나사렛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나사렛출판사의 공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나사렛출판사는 미국에서 종교출판사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출판사로 발전하였고 미조리 주에서 제2종 우편물을 제일 많이 발송하는 기관이 되었으며 직원의 수만 해도 200명이 훨씬 넘는다. 나사렛출판사 산하에 초교파적인 출판물을 취급하는 비콘힐출판사와 음악 전문의 릴리출판사 그리고 교재 출판을 전담하는 워드액션출판사가 있다. 그리고 수종의 잡지를 간행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형제 교단들인 웨슬레교회, 자유감리 교회, 복음형제교회, 형제 그리스도의 교회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몇 해 전부터 구세군에서 본 교단의 주일학교 교재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출판사의 수입은 세계선교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D. 봉사(구호)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참된 경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결의 강조는 이웃 사랑과 사회 개혁적인 차원에서 봉사사업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웨슬리가 그랬고 브리지가 이면을 강조하였다.

나사렛교회의 초창기 봉사사업은 교회 설립에 주력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 마다 구호사역에 힘을 쓰게 되고 교단 안에 구호사역부를 두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계층과 불의의 재난을 당한 곳에 의약품과 식량, 의류, 생활 필수품, 건축자재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 6.25사변이 일어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을 때 나사렛교회는 활발하게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많은 것으로 우리를 어려움에서 도왔다.

또 얼마 전에는 북한에 두 차례 대표자를 보내 식량과 의약품 등 약 2백만불 어치를 보냈고 금년 말에 다시 구호물자를 보낼 예정이다. 세계 도처에 재난과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거기에 나사렛의 구호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근자에 소말리아와 피키스탄에서의 활약이 돋보였다. 지금 이러한 구호사업은 국제본부의 구호사역부와 나사렛교회 평신도들이 설립한 마음에서 마음으로(Heart to Heart)라는 자선 단체가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