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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방문 시 꼭 알아야 할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경주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건립된 천문 관측소로, 그 역사적 배경이

경주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건립된 천문 관측소로, 그 역사적 배경이 매우 풍부하다고 들었습니다. 첨성대를 방문하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역사적 사실이나 이야기가 있을까요? 첨성대의 구조적 특징과 그 의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아래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

===

첨성대... 금성의 여신 이슈타르를... 모시기 위한 지구라트

<신라 선덕여왕과 첨성대의 비밀 - 조갑제닷컴 참조>

​우물 정(井)자에 숨은 뜻... 신라인에게 우물은 특별한 의미... 신라인에게 우물은... 하늘과 통하는 장소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 개인 제단" - 신동아 참조>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첨성대는 우물, 우물의 여신

<... 여신연구가가 본 첨성대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 여성신문 참조>

​우물 인신공양

<우물에 던져진 아이… 9세기 신라엔 무슨 일이? - 조선일보 참조>

신라...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통일신라때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있었다? - 서울신문 참조>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이슈타르, 나중에 아슈타르테, 즉 미의 여신임이 분명하다. 아슈타르/아슈타르테는 아사달과 같으며, 문화의 이동과 전파인 것이다.

<새 번역 산해경 [제3권] 참조>

악마 가운데 희귀하게도 여신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풍요와 성애, 금성, 전투 등을 관장하는

여신 이슈타르가 그 원형이다. ...

그녀는 창녀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

싸움이 일어나면... 적의 피를 흠뻑 대지에 스며들게 했

다. ...

이것이 가나안에 전해져... 아스타르테가 되자 성경에

마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수소의 머리를 한 여성으로 표현...

그녀는 바알의 배우자로 천후(天后 : 하늘 여왕)라고도

불렸으며, 이 신을 모시는 의식은 모두 여성이 했다. ...

달은 아스타르테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입술이 피로 물

들었고 온몸에 시커먼 옷을 입은... 오른손에는 독사를

쥐었고 지옥의 용 또는 뱀 위에 올라타고 있다. 그의 숨

결에서는 악취가 나고 독소까지 포함되어 있다...

나쁜 일을 좋아하고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사람들이 괴

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긴다.

<아스타로트 -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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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로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배경 ​ [ 편집 ] 악마 가운데 희귀하게도 여신 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바빌로니아 의 풍요와 성애, 금성, 전투 등을 관장하는 여신 이슈타르 가 그 원형이다. 이슈타르는 평소에는 자비가 많고 은혜를 많이 내리는 여신이었지만, 변덕이 심해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이 식어버리면 예전의 연인을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동물로 바꾸는 등 그 소행이 지나친 데가 있었다. 또한, 그녀는 창녀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스스로 무기를 잡고 남자들 뺨칠 정도로 활동하여 적의 피를 흠뻑 대지에 스며들게 했다.

ko.wikipedia.org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요한계시록 17장>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바빌론이... 큰 음녀...로 나와 있다. 음녀라...불린 이유는 바빌로니아 땅에서...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여신 이슈타르 때문

<낙원 바빌론, (저자) 마노 타카야, 네이버지식백과 참조>

장승: 악마 기둥(Devil Post ; 데블 포스트)

<장승 - 나무위키 참조>

"아셰라는 여신 아세라를 숭배하는 데 사용된 나무 기둥... 아세라는 신들의 우두머리의 배우자(아내)로 숭배... 아세라 여신을 숭배하는데 사용되는 나무 기둥을 가리킬 때에는 '여신 아세라의 형상/우상'이라고 확장해서 번역해도 될 것이다. '여신 아세라를 숭배하기 위한 신성한 기둥들' 요즈음 학자들은... 아세라 신을 상징하는 나무로 된 특별한 기둥이라고 생각"

<성서 속의 물건들 - 저자; 레이 프리츠>

"아세라 목상을 불태우고...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신명기 12장>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사르십시오." <신명기 7장>​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리고... 산당과 제단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앤 다음에" <역대하 31장>​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역대하 34장>​

​"바알 신들을 섬기는 제단들을 헐었다...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그 제

단에 제사를 드리던 자들의 무덤" <역대하 34장>​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출애굽기 34장>​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아세라 목상을 부수었다." <역대하 14장>​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다." <역대하 24장>​

​"그는... 산당들을... 세우고, 바알들을 섬기는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들을 만들고, 하늘의 별을 숭배하여

섬겼다." <역대하 33장>​

​"너희가 만들 주 너희 하느님의 제단 옆에, 어떤 나무로도 아세라 목상을 박아서는 안된다." <신명기 16장>​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고, 주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더

라. 이에 그들이 그들의 조상의 주 하나님의 전을 떠나 아세라들과 우상들을 섬겼으니, 그들의 이 죄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임하였더라."

<아세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단군 ... 바알신... 단군신화의 일본 전승... 한일(한국과 일본) 양국의 건국신화... 의 오리엔트 기원설...

단군신화와 우가리트 신화의 구조가 유사하다... 한국의 건국신화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한국으로 전래...

1. 환인의 아들 환웅...

다곤의 아들 바알...

2. 환웅은 천부인 3개를 가지고...

바알은... 제벨·엘·아쿠라의 주인...

3. 환웅은 풍백·우사·운사와 부하 3천인을 데리고 삼위태백에 내려가...

바알은 비·바람·구름 그리고 모든 궁정인을 데리고 지상에 내려가...

<[경북연합일보]단군신화와 성경의 바알신 참조>

아사달은 마리 유적의 여신 '아스타르테... 다곤이라는 신의 이름은 단군의 본래 소리

<단군은 옛 시리아의 신 ... - 한겨레 참조>

몸은 마치 인간의 몸과 같았지만 머리는 마치 물고기의 머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맛지마 니까야(마라 견책 경) 중에서 '악마 마라(빠삐만)의 모습>

<출처: Dagon(다곤신) - Wilimedia Commons(위키피디아 커먼스)>

〔신 라(新 羅)〕

【진한(辰韓)】

이전에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온 중국인 무리가 마한(고구려)의 동쪽 영토에 많이 머물렀는데 진한에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 때에 이르러서 점점 번성하니 마한(고구려)이 이를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盛故馬韓忌之有責焉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혁거세 거사간(赫居世 居西干)>

신라 사람은 그 선조가 진한 종족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진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도망온 사람들인데, 마침 마한(고구려)이 그 동쪽 영토(東界)를 분할하여 머물게 하였으며, 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진한이라 하였다. 그 언어와 사물을 일컫는 것이 중국인과 유사한다... 마한(고구려)과 같지 않다... 그것은 그 자들이 흘러들어온 자들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항상 마한(고구려)의 통제를 받았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不與馬韓同... 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初附庸于百濟

<북사(北史)>

"신라는 애초에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

新羅始附庸於百濟...

(신라시부용어백제)...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고구려)에서 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始從高麗來...

[금지시조휘합부(구작함보)시종고려래]...

신라와 고려(고구려)의 옛땅은 서로 섞여 있다(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다).

新羅與高麗舊地相錯

(신라여고려구지상착)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서 중에서 자주 두 나라의 호칭을 분별하지 않고 역사로 전하여 기록하였다."

遼金史中往往二國互稱不爲分別史傳

(요금사중왕왕이국호칭불위분별사전)

<대청제국 건륭제 흠정만주원류고>

《돌에 새겨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4) 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 경향신문 참조>

'영락 7년', 즉 4세기 말 광개토대왕 때 비석...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때 세워진... 원조 광개토대왕비가 되는 것이죠.

더 놀라운 일은 '삼국사기' 같은 기존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고대사... 가 이 비문에서 펼쳐진다...

397년... 그 이전에 신라가 '고구려권(圈)'에 속했다...

광개토대왕은... 남한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판도를 넓힌 사람...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397년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일으켜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

남·북에서 동시에 군사작전을 할 힘이 당시 고구려에 있었다.

​<... 장수왕이 세운 줄 알았는데... 광개토대왕 연호 발견됐죠 - 신문은 선생님, 조선멤버스, 조선일보 참조>

"백제의 잔여세력과 신라는 왜(倭)와 같이 옛적 고구려에 속한 백성이어서 조공을 하였다. 신묘년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의 잔여세력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 6년, 병신년에 광개토태왕이 몸소... 군대를 인솔하여 남은 나라들을 토벌하였다."

百殘(백제의 잔여세력)新羅舊是(이다.)屬民由來朝貢(유래조공)而(~와 같다.)倭(왜)以辛卯年來(조동사 역할: 다른 동사 앞에 써서 어떤 일을 능동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시도함을 나타냄.)渡海破百殘東▨新羅以爲(~ 으로 삼다.)臣民 以六年丙申王躬(몸소)率▨軍討伐殘(남은)國(나라)

<광개토왕릉비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아프가니스탄이 신라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신라예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분쟁이 생겨도... 물러서는 모습이 상대를... ​아주 경멸해서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신앙문답] ...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 기독일보 참조>

<아프간... 이보다 썩은 나라는 없다?!... >

​【화랑】

신라의 화랑(花娘) = 아프가니스탄의 바차 바지

<아프간 악습 '바차 바지', 어린 소년 여장시키고 성적 학대 - 기독일보>

모죽지랑가...사다함...비록 실학자였지만 엄숙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호 이익(1681~1763)이 아유가이가 동성애 집단 이야기를 꺼내기 200년 전에 <성호사설>(제18권)에서 미남자로 뽑혀 얼굴에 분을 바르는 화랑들의 '음란하고 추악한 <남색(男色)>'을 개탄한 바 있다.

<화랑들이 '변태'여서 부끄러운가 한겨레21 참조>

화랑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다정한 젊은이 <화랑은 무사 집단이었을까 한겨레 21>

또한 몇몇 향가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 화랑들의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화(花)'나 '랑(?)'도 여성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이다... 미모의 남자를 화랑으로 삼게 됐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화랑들은 자연스레 동성애의 대상이 됐다.

<...기록상 최초 동성애자 군주는 신라 혜공왕 스포츠경향 참조>

왕에게 전문적으로 섹X를 제공하는 특수 상류계층이 존재한 나라, 남매끼리 결혼이 자연스러웠고 남자도 ... 몸을 바쳐야 했던 나라 ... 신라다.

<문란인가 자유인가 섹X천국 신라 - 뉴시스 참조>

화랑(花郞)은 무당의 지아비이고, 방언에는 광대라 하였다. <목민심서>

화랑은 선도(仙徒)이며, 신궁(神宮)을 받들며, 하늘에 큰 제사를 지낸다. <화랑세기>

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방언으로 무당이며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했다.

<삼국유사>

원화(源花)를 받들기 시작했다. ... 그 여자를 쓰고자 하였다. ... 그후 다시 미모의 남자

를 모아서 그 남자를 꾸미고 치장하여 그 남자를 받들며 화랑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첨성대】

첨성대... 금성의 여신 이슈타르를... 모시기 위한 지구라트

<신라 선덕여왕과 첨성대의 비밀 - 조갑제닷컴 참조>

우물 정(井)자에 숨은 뜻... 신라인에게 우물은 특별한 의미... 신라인에게 우물은... 하늘과 통하는 장소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 개인 제단" - 신동아 참조>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첨성대는 우물, 우물의 여신 <... 여신연구가가 본 첨성대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 여성신문 참조>

우물 인신공양

<우물에 던져진 아이… 9세기 신라엔 무슨 일이? - 조선일보 참조>

신라...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통일신라때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있었다? - 서울신문 참조>

【단군신화】

"단군... 바알신" <단군신화와 성경의 바알신​ - 경북연합일보 참조>

"다곤신은 단군" <단군은 '옛 시리아의 신'... 황당하다고? - 한겨레 참조>

【갈족(羯族)】

백인종이었던 갈족(羯族)여자를 잡아서 노예로 삼았다가 이동시에는 식량으로 사용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보였다... 한족은 후조(後趙)를 세웠던 갈족(羯族)을... 몰살시키고 그 시대를 기억조차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 "삼국지 인문학" 특강 - 유선편 - 톱뉴스 참조>

갈족(羯族)은... 흉노... 에게 정복되어 흉노족의 노예가 되어서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까지 강제이주... 동아시아의 영웅 염민은 갈족(羯族)에게 가축과 성노예로 잡혀 있던 수십 만의 소녀들을 구출했다.

<한족에 의해 멸망된 갈족>

갈족(羯族)은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일대에 거주하던... 소그드인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 신동아 참조>

거사는 옥(玉)을 뜻하는 카시(kash), 쿠시(kush)의 한자음 가차... 월지연맹체를 구성하던 하위집단 카시(kash) 부족...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한족(漢族) 사람들은 거사(車師)... 라고 기록... 갈족(羯族)은 본래 흉노족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 민족의 하나... 갈족(羯族)의 갈(羯)은 거세한 양을 뜻하지만 이 종족의 원음이 카시(kash)... 민족은 소무구성이라 기록된 소그디아나(파미르와 텐산 이서의 중앙아시아) 출신들인 소그드인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저자) 연호탁 참조>

신라 유물의 일정한 특징은 소그드족 유물과 비슷한 점입니다. 소그드족은... 중앙아시가 타지키스탄 부근을 중심으로 살던 이란계 민족

<신라 황금 유물이 일본에 온 까닭은? - 오마이뉴스 참조>

소그드인은... 스키타이족으로도 불리는 이란계 민족

<소그드인, 스키타이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년 7월... KBS역사스페셜... 에서 스키타이... 신라인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이 밝혀졌다.

<김일제는 신라인이었을까 - 한겨레:온 참조>

<고인골 유전자 분석표 - KBS 역사스페셜 참조>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족 탈레반】

파슈툰족은... 이란계 민족... 탈레반... 스키타이족... 파슈툰족에게서 출토된... 금관... 경주에까지 이어졌다.

<... 아프가니스탄 금관이 경주 금관... - 탄소중립net-zero투데이 참조>

<탈레반이 추종하는 건 부족 관습..."여성탄압 계속될 것" ... - 한국일보>

신라의 금관과 아프간 금관은... 친척... 흉노에게 쫓겨 나라를 세운 대월지국... 아프간... 신라

<... 탈레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신라 - 극제신문 참조>

【신라의 어원】

수와 당 시절에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국을 호국(胡國)이라했다.

<유목민족 가리키는 '호'의 변천 - 한겨레 참조>, <시대·시기별로 '호'의 정체 달라 - 한겨레 참조>

월지의 후손일 가능성이 아주 큰 소그드인을 왜 중국인들은 胡(호)라고 불렀을까... 월지가 흉노에 쫓겨 소그디아나 지역으로 서천하기 전... 거사... 는 왕가의 명칭... 車師... 를 차사... 가 아닌... 거사... 로 읽는 연유가 그와 관련... 흉노에 몰린 월지의 한 갈래... 끝이 뾰족한 펠트 모자는... 스키타이의 뾰족 모자... 玉(옥)... 을 뜻하는... 쿠시... 카시... 의 음차어... 車師(거사)... 胡(호)는 처음에는 특히 흉노를 지칭... 나중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서역의 이민족 마저 胡(호)

<... 말(言)... 고민에 사막의 뜨거운 밤은 새벽까지... - 교수신문 참조>

胡(호)가 범어로 술리[Suli. 蘇哩(소리)]다.

<범어잡명(梵語雜名)>

소리[蘇哩. Suli(술리)]가 수그딕(Su...ik)의 한자음 음사어로 소그드를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

【투르크족과 스키타이족】

튀르크 민족사는 흉노에서 출발한다...

흉노 제국의 지배 계층은 튀르크계임이 분명하다... 훈족을 흉노족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突厥(돌궐)... 은 튀르크의 중국어 음역으로... 돌궐을 위구르가 이어받고, 그의 일파인 오우즈족이 서진해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이루었다...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정착국가를 건설... 백인종 전사가 튀르크족의 원류... 즉 튀르크족의 특질을 흰색 피부, 짙은 눈동자... 를 가진 백인종, 그 중에서도 4대 백인종 그룹의 유로피드 투라니드(중앙아시아 유럽인) 계통으로 보고 있다... 언어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카스피해 북서 초원 지대가 튀르크족의 본거지...

러시아 남부의 스키타이와 뚜렷이 구분되는 체질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 점

<터키사 100 "가장 쉽게 읽는 터키사", (공)저: 이희수 참조>

【몽골족과 스키타이족】

알타이... 백인... 알타이 산맥이... 황인종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준다... 스키타이... 페르시아 출신 월지족... 중요한 점은 백인이라는 거다... 몽골초원 흉노무덤 출토 직물 속에 등장하는 백인. 몽골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알타이 지역 고대무덤뿐 아니라... 몽골초원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백인...

몽골 초원에 황인종이 산 역사는... 짧다... 1천년도 채 되지 않는다.

12세기 징기스칸의 몽골족이 진입...

8세기-11세기 몽골초원의 주역... 위그르족은 백인이다... 6세기-7세기 몽골초원의 주역은 돌궐족, 오늘날 터키인, 백인인 투르크다... 훈(흉노)... 백인용모를 유물에 남겨 놓는다. 고인돌의 전파 경로에 있던 알타이 지역과 몽골 초원 거주자 대부분 백인이었다.

<고인돌에서 나오는 백인 추정 유골... - 단비뉴스 참조>

【위만조선(魏滿朝鮮)】

고구려와 백제가 夫餘系(부여계)... 부여계는 인종적으로 퉁구스계... 신라는 흉노계...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출자)가 다르다...

居西干(가사간)은 흉노-알타이계 부족장...

위만조선의 지배층과 낙랑군의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이 흉노 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위만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위만조선이 망하거나(기원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이동하여 경주지역에 정착하였다... 위만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주민)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진나라)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진수)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

한무제가 기원전 2세기에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위만조선을 친 것이다... 漢武帝(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漢族(한족)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

<騎馬(기마)흉노국가 新羅(신라) 연구 - 월간조선 참조>

흉노의 모돈(묵특선우)이 새로이 북이(기자조선)를 정복하였다.

匈奴冒頓新服北夷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묵특 ...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 ...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 ...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2) - 대한민국 정책포럼 참조>

위만조선의 주류도 흉노족

<한반도의 철기문화 몽고의 오르도스계 영향 - 중앙일보 참조>

(흉노의)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좌우궁인을 인솔하고 바다를 넘어서 남쪽 한지에 이르러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마한이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이르기를 '마한이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魏滿擊朝鮮朝鮮王準率宮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崔致遠云馬韓麗也

<삼국유사(三國遺事)>

<진국(辰國. 마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만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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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만조선 (衛滿朝鮮: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또는 위씨조선 (衛氏朝鮮)은 고조선 의 마지막 왕조로, 기원전 194년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 이 중화인들과 함께 역성혁명을 일으켜 번조선이자 기자조선 의 마지막 왕인 기준 을 속여 왕위를 찬탈하고, 기자조선을 빼앗으며 시작됐다. 위만조선은 중국계 유민과 토착민이 연합한 국가로 여긴다. 이들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변 지역을 활발히 정복하였고,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위만조선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국 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에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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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위만조선을 쳐서 현토·낙랑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東伐朝鮮起玄?樂浪以斷匈奴之左臂

<한서(漢書)>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4)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 경향신문 참조>

"옛적 백제의 잔여세력과 신라는 왜(倭)와 같이 고구려에 속한 백성이어서 조공을 하였다. 신묘년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의 잔여세력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 6년, 병신년에 광개토태왕이 몸소... 군대를 인솔하여 남은 나라들을 토벌하였다."

百殘(백제의 잔여세력)新羅舊是(이다.)屬民由來朝貢(유래조공)而(~와 같다.)倭(왜)以辛卯年來(조동사 역할: 다른 동사 앞에 써서 어떤 일을 능동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시도함을 나타냄.)渡海破百殘東▨新羅以爲(~ 으로 삼다.)臣民 以六年丙申王躬(몸소)率▨軍討伐殘(남은)國(나라)

<광개토왕릉비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영락 7년', 즉 4세기 말 광개토대왕 때 비석...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때 세워진... 원조 광개토대왕비가 되는 것이죠.

더 놀라운 일은 '삼국사기' 같은 기존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고대사... 가 이 비문에서 펼쳐진다...

397년... 그 이전에 신라가 '고구려권(圈)'에 속했다...

광개토대왕은... 남한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판도를 넓힌 사람...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397년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일으켜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

남·북에서 동시에 군사작전을 할 힘이 당시 고구려에 있었다.

<... 장수왕이 세운 줄 알았는데... 광개토대왕 연호 발견됐죠 - 신문은 선생님, 조선멤버스, 조선일보 참조>

【신라는 백제의 속국】

"조심하여 꼼꼼하게 따져 검토해 보면,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되어 있었다(신라는 초기에 백제의 속국이었다)."

謹案新羅始附庸於百濟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대청제국 건륭제>

"신라는 애초에 백제에 부용(속국, 식민지)되어있었다."

新羅 ... 初附庸於百濟

<북사 당·이연수 열전 사이(北史 唐·李延壽 列傳 四夷)>

섭라(신라)가 백제에 병합되었다.

涉羅爲百濟所竝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문자왕(504년 04월)>

<"섭라는 제주도가 아니라 신라로 봐야 한다" - 미디어제주>

백제는 옛날의 래이(來夷)이며 마한(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진(晉)나라 때에 구려(고구려)가 요동·낙랑을 차지하여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현을 차지하였다... 백제 주변에 작은 나라들이 있어서... 사라(신라) 등이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麗畧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旁小國有... 斯羅... 等附之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국사(百濟國使)>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0여 리에 있다. 신라 땅은 동으로 큰 바다와 연해 있고 남북으로 구려(고구려)와 백제에 접해있다... 송나라 때에... (신라를) 사라라고 하였다. 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이름이 모진(법흥왕)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파견하여 백제를 수행하는 하인으로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 宋時... 或曰... 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이二年王名募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양서(梁書) 권54, 열전48 제이(諸夷)>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 밖에 있다. 신라 땅은 동쪽으로 큰 바다와 연해 있고 남북으로 구려(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 송나라 때는... (신라를) 사라라고 하였다. 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양나라 보통 2년(A.D.521; 신라 법흥왕 8)에 성씨가 모, 이름이 진인 신라왕(법흥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수행하는 하인으로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新羅... 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麗百濟接... 宋時... 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梁普通二年王姓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신라가 한(韓)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 그 나라(신라) 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는 없다.

<'양직공도'서 신라 · 고구려 제기 발견돼 - 서울신문 참조>

538년에 백제 성왕은 몸소 백제와 신라 및 가야 두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회복했다. 또한 군사를 전진시켜서 평양을 쳤다. 모두 6개 군의 땅을 회복했다.

<일본서기>

​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는가라고 말한 후, 이 말을 고구려에 전했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先是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髙麗真興曰國之興亡在天若天未猒髙麗則我何敢望焉乃以此言通高麗高麗感其言與羅通好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흥왕>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이 정작 힘들게 개척했던 군사기지를 후퇴하는 시점을 전후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산 정상 부근에 (몰래)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 碑文은 승려 아닌 거칠부 작품" - 문화일보 참조>

진흥왕 순수비를 왜 높은 산에 세웠는 지 ... 진흥왕이 비석을 ... 신라가 후퇴하는 지역에 (몰래)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 비문 거칠부가 지었을 것" - 경향신문 참조>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 “킨메이 천황은 백제 성왕이다.”... 백제 성왕이 540년 고구려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긴메이 천황(欽明)으로 등극하였다.

<"26대 게이타이 천황, 백제 무령왕 친동생 - 동아일보 참조>

(서기540)년에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다 패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 와서 킨메이 천황이 되었다... 성왕이... 왜국왕 왕위를 겸임(兼任)하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531년이다... 서기 531년 2월 7일에 성왕의 숙부인 케이타이 천황이... 서거했기 때문에... 그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왜국땅으로 건너갔다. 성왕은... 숙부 케이타이 천황의 장례를 마친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나카가와 토모요시의 연구론 『渡來した神』

“칸무 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하면서, 히라노 신사를 지어 신주를 옮겨다 모신 제1 신전의 금목신은 백제의 성왕이다.”

노부토모의『번신고(蕃神考/伴信友全集)』

“교토의 일본 왕실 사당인 히라노 신사의 제1 신전의 신인 금목신(今木神)은 백제 성왕이다.”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교수 나이토우 코우난의 일본 신도 연구 저서 『近畿地方に於ける神社』

“제1신전의 금목신은 외국(外國)에서 건너온 신(백제 성왕, 백제 성명왕)이다."

이마이 케이이찌의 『贈皇太后高野氏と平野神』

“히라노 신사 제1신전의 금목대신은 백제 성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서기1648(慶安元年)년에 세이진(淸尋)이 『대초자』 전본(傳本)에서 ‘히라노어가’에 대하여 덧붙여 쓴 해설문

“欽明天皇也是平野明神云了.”

“킨메이천황이 히라노명신(백제 성왕)을 의미한다.”

코바야시 야스코의 『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백제 성왕은 일본에 와서 킨메이 천황으로 등극하였다”

<백제 성왕의 일본왕 겸임과 불교 포교 - 불교평론 참조>

백제의 성왕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됐다.

<... 아스카문화 창시자 왕인박사 - 전남일보 참조>

가야는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가 지배하는 영역. 야마토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고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 킨메이 천황이 성왕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임나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 프레시안 참조>

552년 고려(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백제와 가야를 멸하려고 도모한다.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券19) 흠명천황(欽命天皇. 킨메이천황: 백제 성왕)>

신라는 서쪽 오랑캐로서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르고 예의가 없으며 우리의 은혜와 의로움을 저버렸다... "(백제는) 신라가 궁해져가는 것을 애달피여기고 신라왕이 목베일 것을 온전히 두었으며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었고 신라를 남달리 번영하게 해주었다 ... (백제가) 신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볍게 대우했으며,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가. 그러나 신라는 ... 임나(대가야)를 능욕해 멸망시켰고 ...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잔인하게 백성을 죽였다 ... 간을 꺼내고 발목을 끊어도 마음에 흡족해하지 않고 뼈를 드러내고 주검을 태워도 혹독하다 여기지 않았다. 임나(대가야)의 귀족과 백성 이하 모두는 칼을 다 쓰고 도마를 다하도록 이미 살육당하고 회쳐졌으니 어찌 온 천하가 ...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을 것이다.

新羅西羌小醜 逆天無狀 違我恩義... 哀新羅所窮見歸 全新羅王將戮之首 授新羅要害之地 崇新羅非次之榮 我氣長足姬尊 於新羅何薄 我百姓 於新羅何怨 而新羅 長戟强弩 凌蹙任那 鉅牙鉤爪 殘虐含靈 刳肝斮趾 不厭其快 曝骨焚屍 不謂其酷 任那族姓 百姓以還 窮刀極俎 旣屠且膾... 而不悼心... 報君父之仇讐 則死有恨臣子之道不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欽命天皇. 킨메이 천황: 백제 성왕 23년: 562년)>

완충국(緩衝國, buffer state)...

대립하는 여러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국가... 상대 강대국과 직접 영토를 맞닿는 것보다 그 사이에 완충국의 독립과 존속을 허용... 상대 강대국의 위협을 완화... 태국... 우루과이, 스위스처럼...

조선: 청나라, 러시아, 일본 제국의 완충 지대였으나 고종의 외교 실패로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고 끝내 일본에 합병되었다.

북한: 중국(러시아), 미국(대한민국)의 완충국

<완충국 - 나무위키 참조>

<고구려와 백제의 완충국이었었던 신라, 백제 무왕 ~ 의자왕 당시 삼국 영토 현황>

김유신이 진덕여왕에게 "백제를 칩시다."라고 말했다. 진덕여왕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인 신라가 대제국 백제를 건드렸다가 장차 위태로워지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庾信 告大王曰請"伐百濟以報大梁州之役.”王曰"以小觸大, 危將奈何?"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三國史記 列傳 第一 金庾信 上)>

【신라는 당나라의 속국】

당 태종 황제께서 김춘추에게 정2품의 관작을 내리시니 그 영예는 ... 만큼 높은 것이라... 김춘추가 진덕왕 2년 당태종 황제께 당나라의 관복을 하사받고 돌아와 신라의 의관제를 당나라식으로 고쳐서 이듬해부터 신라의 왕과 관원들이 모두 당나라의 관복을 입고 당태종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당나라의 고종 황제께서도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김춘추로 신라왕을 삼노라 하였다. 당나라의 황제께서는 김춘추가 멀리 푸른 바다를 건너와 궁궐에 조회하여 열심히 조공을 바치는 것을 가상히 여겼다.

<신라 비문 김인문비 해석문 참조>

김춘추가 당태종을 보자,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가 거의 멸망하여 위급함을 알리고 많은 예물을 바쳐 당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며 아들 법민(문무왕)과 인문 등을 당나라에 인질로 두고 신라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의복과 관복을 입고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썼다(신라는 당나라의 지방 정부가 되었다). 김춘추는 조선을 업신 여기고 모욕하는 글을 그대로 가져다가 신라에 유포 시켜서 사대주의 의 병균을 퍼뜨렸다.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참조>

<643년 11월>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으니 신라 선덕여왕 이 당나라에 사신(使臣) 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렸다.

<644년 9월>

​ 다시 당에 거듭 군사를 요청했으나, 당 태종은 여왕의 무능함을 질타하며 거절한다.

<654년>

​ 김춘추가 신라의 왕으로 등극했고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의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공해

33개 성을 빼앗아 가자 이번에도 김춘추가 당나라에 병력을 요청했으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655년 10월>

​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다.

<659년 4월>

​ 김춘추가 또 다시 당나라 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당나라의 결정권자가 된 측천 무후는 드디어 김춘추의 파병요청에 응했다.

한반도에 이해관계 많은 산동파 권력 장악... 개전 논의 가속화... 관롱파 숙청... 측천 무후와 그 일당은 내부 숙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 관롱군사집단의 거두 장손무기가 사라지고 산동파가 조정내 결정의 대세를 움직일 수 있는 우위... 국익에 우선한 파벌의 이해... 토번... 서역에 전운... 그럼에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

<당나라에 억류 조치 당나라, 서기 660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 - 국방일보 참조>

예식진 ... 중국 산동에 살던 예씨 ... 수나라 ... 때 동래자사인 예선(善)이 백제로 왔다.

<의자왕 중국에 넘긴 백제 예씨 ... - 연합 참조>

예식 가문이 중국에서 백제로 건너간 후손 ... 이 가문이 중국 유민을 표방했다 ... 중국 산동에 살던 예씨가

... 수나라 ... 때 동래자사인 예선(善)이 백제로 왔다.

<의자왕 중국에 넘긴 백제... - 국제신문 참조>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

<의자왕은 승리할 수 있었다 - 한겨레 신문>

5세기 전반부터 공주 지역에 터를 잡고 있던 예식의 조상들은 중국 산동반도 서남쪽에서 건너온 중국계 이주민이었다... 전쟁포로는 대개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는 것이 일반적... 그러나 의자왕과 백제 포로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당 고종은 ... 모두 사면하였다. 여기에는 소정방의 노력이... 소정방은 ... 포로들을 처형하지 않고 모두 사면하도록 황제에게 늘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의자왕은 ... 사면되었다.

<웅진성 방어 맡은 예식 의자왕 포로로 바치고 당에 들어가 출세 ... - 주간조선 참조>

소정방이 독살되어 신라에 묻혔다.

定方 ... 鴆之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당군을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당나라의 고종황제는 신하들을 책망하여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어 포증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대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말하였다.

帝悼之責謂侍臣曰定方於國有功當褒贈若等不言何邪

<신당서(新唐書)>

소정방이 죽었으나 누구 하나 포증하자는 말이 없자,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탄식하여 '소정방은 나라에 공이 있어 포증하는 것이 합당한데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으니 탄식하여 애도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노라.'라고 말하였다.

高宗聞而傷惜謂侍臣曰蘇定方於國有功例合褒贈卿等不言遂使哀榮未及興言及此不覺嗟悼

<구당서(舊唐書)>

부여융은 조부인 무왕이나 부왕인 의자왕이 당으로부터 부여받았던 대방군왕... 을 동일하게 습봉하였다... 백제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안고성의 백제 왕국은 8세기 중반이나 9세기 초반... 발해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에 (백제가) 발해말갈에 분할 되었다는 구절은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 멸망시기 8세기 중반~9세기 초로 봐야 - 서울신문 참조>

생존을 위한 신라의 對唐(대당) 저자세 밀약

<삼국통일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 월간중앙 참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뜻도 능력도 없었다.

<한국사는 없다, 저자: 이희근, 사람과 사람, 2001년 08월 30일 참조>

삼국통일은 허구이다.

<한국사 새로보기, 저자: 신복룡, 풀빛, 2001년>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남북국시대다.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저자: 이이화, 푸른역사, 2000년 06월 30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왕명을 받아 최치원이 글을 썼다... 국립경주박물관...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적었다... 조금 더 읽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의 잔당이 태백산 아래 모여서 발해를 건국했다.'... 삼한통일은 깨진 것이다. 마한이 결국 발해가 됐으니... 최치원은...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서... '... 당나라가 고구려를 차지했다'고 기록... 삼국 통일이 아니라, 삼한 통일조차 못한 것... 이 글은 왕명을 받아 작성... 왕의 '최종 결재'도 받았을 것... 신라의... 왕실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했음'...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감사하며 효공왕이 올린글'... 에서도 '예전의 고구려가 지금은 발해가 됐다'고 기록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신라인은 삼국 통일에 부정적 인식... 사학계 '신라 띄우기' 역사 왜곡 불러 - 한겨레21 참조>

당나라는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4만 명으로 알려졌으며 672년 8월 신라군이 석문(石門)에서 당나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신라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신라군의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과 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과 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과 양신(良臣) 등이 사망했다... 석문전투 이후 9월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죄문과 금, 은, 구리, 바늘, 우황, 포목 등 막대한 진공품을 바쳤다. 이 해 신라는 곡식이 귀하고 기근이 들었다.

<석문전투(石門戰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문무왕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臣) 아무개(문무왕)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뢰나이다. 전일(前日)에 신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황제 폐하의 구원을 입어 도멸(짐승처럼 찢어 죽임을 당하여 도살되어 멸망하는 것)을 면하게 되었사옵나이다. 몸과 뼈가 부수어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황제 폐하의 자애로운 은덕을 갚을 수 있겠나이까. 그러나 깊은 원수인

백제는 신의 변방을 침범하여

핍박하고, 하늘의 군대를 이끌어 신을 멸하여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게 되었나이다. 신이 미처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잠시라도 신령스런 귀를 기울여주시어 근본되는 이유를 밝게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신은 전대(김춘추)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근래에

백제 때문에 거듭 조공을 빠뜨려서

드디어 성스러운 큰 조정(당나라 조정)에서 말이 나게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토벌하게 하셨나니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남음이 있어,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며 포야(褒斜: 중국 종남산의 골짜기)의 숲도 신을 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 폐하께서 이 사정에 귀를 기울여 판단해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육시하다(戮屍--: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을 가하다.)}을 받겠나이다.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빌다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당나라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형벌을 엎드려 청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서 얼굴의 광채를 온 세상 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덕으로 살아가며 살리시기를 좋아하시는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죽이기 싫어하시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까지 흐르나니 만일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아뢰오니,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아무개(문무왕)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王獲罪大朝上表乞罪曰臣某死罪謹言昔臣危急事若倒懸遠蒙拯救得免屠滅粉身?骨未足上報鴻思碎首灰塵何能仰酬慈造然深讐百濟隔近臣蕃告引天兵滅臣雪恥臣懼破滅自欲求存枉被凶逆之名遂入難赦之罪臣恐事意未申先從刑戮生爲逆命之臣死爲背恩之鬼謹錄事狀冒死奏聞伏願少垂神聽炤審元由臣前代已來朝貢不絶近爲百濟再虧職貢遂使聖朝出言命將討臣之罪死有餘刑南山之竹不足書臣之罪褒斜之林不足作臣之械?池宗社屠裂臣身事聽勅裁甘心受戮臣?擧在側泥首未乾泣血待朝伏請刑命伏惟皇帝陛下明同日月容光?蒙曲炤德合乾坤動植咸被亭毒好生之德遠被昆蟲惡殺之仁爰流翔泳?降服捨之宥賜全腰領之恩雖死之年猶生之日非所希冀敢陳所懷不勝伏劒之志謹遣原川等拜表謝罪伏聽勅旨某頓首頓首死罪死罪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銅三萬三千分針四百枚牛黃百二十分金百二十分四十升布六匹三十升布六十匹是歲?貴人飢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왕이 당나라에 용서를 구하다 (672년 09월(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사람들이 굶주리다 (672년 (음))>

672년 이근행은 20만 명이 아닌, 자신의 말갈족 병사 3만 명을 지휘해 한반도에 왔다. 신라군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을 패주시킨 게 아니라, 토번과 전쟁을 위해 이근행 부대가 철수했다. 675년 당나라의 신라 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매소성 전투는 벌어졌다.

<한나절에 읽는 발해의 역사, (공)저: 이윤섭, 이선영 참조>

​기벌포 전투의 내용도 양측 주력군의 회전이 아니라...신라 측 주장인 시득의 관등이 8등인 사찬이기 때문에 신라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또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뒤 크고 작은 전투가 22회나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 사이의 전투라고 보기 어려운 전황...기벌포 전투가...나당전쟁을 마무리 짓는...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 매경프리미엄 참조>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676년 11월(음)) 그런데 '구당서 권제83'과 '신당서 권제111'의 열전 설인귀 전에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674~676년에 중국 남부의 상주(象州)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670년 8월 토번(吐蕃)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패배 후 제명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조>

신문왕대(681~692)에 신라는 한강 이북 지역을 거의 방치...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 헌덕왕(809~825)에 이르러서야 대동강 남쪽 연안을 신라의 영토로 확정...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 신라가 애초부터 삼국 통일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諸侯之外守者(제후지외수자)라 자처...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들의 비문들에서는 有唐新羅國(유당신라국), 大唐新羅國(대당신라국) 이라 하여, 신라는 스스로를 당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이전의 형식적, 실리적 사대가 이념적, 실질적 사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라는 계속해서 골품제를 유지함으로써 삼국민의 융합에 제약을 가했다... 김부식도, 고러시대와 조선시대 왕조에서도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하야시 다이스케는 저서 '조선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로 규정... 그 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신라의 반도 통일'로 정의... 일본 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 만주를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옛 고구려 땅은 더 이상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논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검토 참조>

당나라 현종은 볼모로 장안에 와있던 김사란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발해를 치는 대신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당나라 현종의 밀약을 믿고 김윤중과 김윤문 등 4명의 장군들에게 발해의 남쪽 경계를 치도록 했으나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받았다.

<장문휴의 등주원정 - 문화콘텐츠닷컴 참조>

당나라의 현종은 김사란을 귀국시켜 군사를 일으켜 말갈(말갈은 발해를 가리킨다.)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려 한 길(丈) 남짓 쌓여 산길이 막히고 군사의 절반이 사망하여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733) 秋七月 唐 玄宗 金思蘭歸國發兵擊靺鞨南鄙㑹大雪丈餘山路阻隘士卒死者過半無功而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8(第八) 성덕왕(聖德王)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공격을 요청하다>

고대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신분을 나누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근친상간... 카자흐스탄에 살던 스키타이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크 수이예크(... 흰 뼈 제도)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 천마를 그린 나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 전자신문 참조>

신라의 골품제도를 살펴보면 근친상간과 같은 난잡한 성행위가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왕족으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있다. 이러한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이 되고 그 자손이 궁궐에 남기 위해서는, 오직 직계 혈통의 왕족끼리 결혼해 성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 최고의 色女... - 월간조선 참조>

<[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 중앙일보>

신라인들은 피정복민을 무섭게 차별화, 도태시키는 정책을 율령으로 만들어 펼첬다.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은 기본적으로 하층 신분으로 편제

<... 신라, 피정복민 통합정책 대신 극심한 차별 - 중앙선데이 참조>

진골이 많아지자 권력쟁탈전이 치열해져서 김춘추의 후손 낭혜 등 진골귀족을 6두품으로 강등하였다. 권력쟁탈전에서 패한 자들은 지방으로 밀려나 신분이 강등되었다.

<진골(眞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해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귀족들이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노비를 3,000명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에 남의 집 노비가 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도 생겼다. 소수의 사람이 수많은 노비를 부리게 되자, 세금을 바치는 농민의 수는 더욱 줄었다. 수입이 줄어든 정부는 남은 땅과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세금을 매겼다.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은 산으로 숨었으며,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해 신라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895년 세워진 해인사의 묘길상탑에서 '나라 안에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굶어 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라는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벽돌 판이 나왔다.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다.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하고 빌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참조>

<고려, 신라 계승했다...'遺事' 허구도 비판 - 교수신문 참조>

"양반, 사족 등의 명칭이 어떠하든 ... 신라시대 골품제가... 4~5세기 무렵부터 조선후기인 19세기말까지 한국 정치 ... 사회를 규정"

< "한국의 지배 엘리트층은 세계 유례없는 친족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쳐 ... 미르티나 도이힐러 ... - 경향신문 참조>

"세족이 전통의 명문가라면 권문은 원나라, 무인정권 등 잠깐 힘을 얻은 가문들 ...

조선의 건국은 신흥사대부의 등장이 아니라 세족의 귀환이다 ...

16세기 문중의 탄생도 ... 임진왜란·병자호란 ... 도 문중의 승리 ... 국가의 참패는 문중의 지역기반을 더 다질 수 있는 기회 ...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뒤에도 여전히 그 잔향이 남아 있다 ...

헬조선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한국사회 뿌리 깊은 친족 이데올로기 아직까지 이어져" - 한국일보 참조>

가야(伽倻)〕

【가야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족】

아요디아에서 사용된 쌍어문양이 사천성 보주에서도 쓰이고 김해와 일본 규슈지방에서도 상징문양으로 쓰이고 있다... 허황옥은... 인도 쿠샨 왕조(또는 월지국)의 침입으로... 중국 사천성 보주라는 곳으로 이주... 양자강 하류(무한)쪽으로 강제이주... 김해의 금관가야쪽으로 넘어오게 된 것

<[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이야기] 허황옥은 한반도 최초의 결혼 이주여성인가 - 에듀인뉴스 참조>

《일본의 인덕천황릉은 물고기 모양(전방후원분)이다. 물고기는 신(新) 드라비다어로 가야이다. 신(新) 드라비다어는 오늘날 타밀어이다.》

<인도, 허황후로 맺어진 인연 김해시에 보리수 기증 - Queen (보도자료) 참조>

허왕옥이 타밀 계통의 사람... 가야는 신(新) 드라비다어로 물고기... 드라비다어는 타밀어의 뿌리다.

<"허황후는 인도 남부에서 왔다" - 주간경향 참조>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의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진출... 김해 예안리 고분 등 왕족 유골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인도인의 DNA 염기서열과 가까워... 2008년 3월 kbs tv <역사스페셜>... 에서... 인도 남부 타밀인과 가야왕릉 고분에서 나온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유사성을 발견

<허황옥은 바닷길로 한반도로 들어왔다 - 김해일보 참조>

<가야... 인골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분석, 인도 남부의 타밀인과 유사, 허황후의 흔적인가>

【임나는 가야】

① 전라북도 남원시가 임나(가야)의 기문국이다.

② 대구광역시가 임나(가야)의 탁순국이다.

가야금관은 대구시 비산동에서 2점이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

<가야 실체 밝혀줄 획기적 사료-대구 비산동... - 중앙일보 참조>

대구(大邱) 비산동(飛山洞) 내당동(內唐洞) 고분군(古墳群)은 전반적으로 성주 성산가야의 묘제와 유사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대개 기본적으로 가야묘제의 특징. 수목형금동관(樹木形金銅冠) 2개가 출토 되었는데 좀 더 복잡한 형태를 가진 후자는 세부적으로 가야적인 부분도 관찰된다.

<박물관신문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출처: 임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본 국정 역사교과서>

임나를 가야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임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참조>

임나란 가야... 금관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가야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고, 금관가야... 대가야를 특정하기도

<임나(任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일본서기는 가야를 임나로 불렀다... 적지 않은 가야사 전공자들이 가야를 임나라고 한다.

<가야가... 일본서기의 임나가 맞는가 - 경남매일 참조>

【왜(倭)는 가야의 별칭】

왜(倭)가 가야의 별칭이다... 백제 사람들이 가야 사람들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르면서

<위왜설(僞倭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가야를 광개토호태왕비에서는 왜(倭)라고 표현 ㅡ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동북(東北)대 명예교수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2부 - 왜(倭), 바다를 건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1부 - 왜(倭)는 한반도에 있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2부 - 왜(倭), 바다를 건너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倭) 3부 - 왜(倭), 신대륙을 개척하다 - EBS(한국교육방송) 참조>

【왜(倭)는 베트남】

《월(越)의 광동어 발음이 왜(​yueh:yue)이다. 월(越)나라(베트남) 사람들이 왜(倭)이다.》

월나라(베트남) 세력들도 BC 306년 초나라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멸망

<... 오월 전쟁과 오나라의 멸망 그리고... 왜의 확산 - 미디어시시비비 참조>

왜(倭)는... 필리핀, 대만과 해남도(하이난 섬), 그리고 그 섬들과 마주보는 해안... 에 존재

<왕인의 시대에는 대륙의 왜만 있었을 뿐, 일본은 없었다. - 영암신문 참조>

【왜(倭)는 백제와 연합국가】

백제는 한반도 내 존재했던 왜(倭)와 연합국가적 성격... 왜(倭)의 기원 신화에 등장하는 건국의 신의 명칭 구조가 가야의 두 건국자의 명칭 구조와 흡사... 가야(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여러 왕국을 세웠다가 근대에 들어서 버마·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을 건국했다.

<왜인은 중원에서 흘러온 유민이다 - 미래한국 참조>

【가야의 일본 정복】

일본 역사의 시조인 '응신'이 가야인... 응신이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가 함락됐을 때...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다... 응신은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가야인들이 일본에 소와 말을 데리고 일본 후쿠오카에 상륙... 오사카에 도달... 가와치 왕조를 세우고 150년 동안 지속하다가... 주도권을 백제계인 아스카로 넘겨주게 된다.

<일본 속 가야문화 (3) 가야, 일본으로 건너가다 - 경남신문 참조>

<일본을 정복한 한국인 이야기, 호소노 프랭크 作(작), 신동락 譯(역)>

<日本(일본)을 創建(창건)한 伽倻人(가야인): 天皇家(천황가)의 祖上(조상)들 / 프랭크호소노 著(저); 任星熙(임성희), 李達淳(이달순) 共譯(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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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모르겠네요. 님이 직접 확인해 보시고 참조만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