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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역사에 대한 주제 안녕하세요. 요즘 학교에서 일제강점기 관련해서 배우고 있는데, 수업만으로는 조금 부족해서

안녕하세요. 요즘 학교에서 일제강점기 관련해서 배우고 있는데, 수업만으로는 조금 부족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요.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굉장히 아픈 시기였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또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혹시 일제강점기의 전체적인 흐름(정치, 사회, 문화, 경제 변화 등)을 정리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가능하다면 초반의 무단통치, 이후의 문화통치, 그리고 전쟁 시기의 민족말살정책까지 포함해서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탐구 주제창씨개명 정책이 개인의 정체성에 끼친 영향과 오늘날의 시각탐구 동기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 정책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하는데, 그것을 강제로 잃어버린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다.또한 오늘날 이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변화했기에, 과거의 억압과 현재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탐구해 보고 싶었다.시대적 배경① 정치: 1939년 일제는 조선인의 일본 동화를 강요하기 위해 창씨개명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식민 통치를 강화하고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② 사회: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을 겪었다.③ 경제: 거부한 사람들은 토지 명의나 취업, 상거래에서 제약을 받아 생계를 위해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가 일본 제국에게 지배당했던 약 35년간의 시대입니다. 일제통치의 성격이 약 10년을 주기로 세 차례 바뀌어 1910년대·1920년대·1930년대 3분법을 사용합니다. 1910년대 무단통치, 1920년대 문화정치(민족분열통치), 1930년대 이후 파쇼통치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일제시대역사에 대한 주제.

①일제 강점기: 1910년에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았다. 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를 만들었고, 헌병 경찰로 우리 민족을 감시했다. 그 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우리 민족을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독립운동을 더욱 탄압했다. 중국과 태평양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한 뒤로는 우리 민족성까지 없애려 했고, 일본을 위한 전쟁에 우리나라 사람과 물자를 동원했다. 1910년대엔 무단통치, 1920년대엔 문화통치, 1930년대엔 민족말살통치로 변해갔다.

②토지조사 사업: 일제는 토지 제도를 바꾼다며 우리나라 땅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선총독부는 땅의 주인, 가격, 위치와 면적 등을 신고하도록 했다. 그 후 신고한 땅에는 세금을 매기고 제대로 신고하지 못한 땅이나 황실, 관청의 땅은 몰수했다. 땅을 뺏긴 농민들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거나 도시 또는 해외로 떠나야 했다.

③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름은 주식회사였지만, 실제는 일제가 직접 운영하는 특별기관이었다. 이 회사는 총독부가 토지조사 업으로 차지한 땅을 받아 친일파에게 싸게 팔았다. 또 일본에서 농업 이민을 모집해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주가 되게 하였다. 또 회사가 우리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사용료를 비싸게 받았다. 1926년에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이유가 되었다.

④회사령: 우리나라에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이제는 우리나라를 자신들에게 필요한 원료나 식량의 공급처로 생각했다. 필요하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만 회사 설립을 허가해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회사 설립이 어려워 상공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⑤산미증식계획: 일본은 공업이 발달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 쌀이 부족해지니 한국 농촌에서 쌀을 공급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 쌀 생산을 늘리려고 볍씨 품종을 개량하고 저수지를 계속 만들었다. 그 결과 쌀 생산이 늘어났지만, 일본으로 거의 다 가져갔다. 막상 우리나라 사람은 쌀이 부족해 배를 곯았다.

⑥문화통치: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강압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해 문화통치로 바꾸어갔다. 군인만 맡던 조선총독을 문관으로 임명하고, 헌병 경찰도 없애겠다고 했다. 또 언론, 집회, 단체활동을 보장하고 교육과 상업도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문관 총독은 한 명도 없었고 헌병 경찰 대신 일반 경찰을 3배로 늘렸다. 신문, 잡지에 일제 비판은 싣지 못하게 했고 문화통치를 빙자해 친일파를 육성해 민족 분열을 꾀했다.

⑦간토대지진 한국인 학살: 1923.9.1. 일본 간토 지역에 규모 7.9의 강진이 일어났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10만 이상이 사망, 실종됐다. 혼란이 커지자 일제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 가짜 뉴스에 흥분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찾아내 마구 죽였다. 이때 한국인 수천 명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⑧민족말살통치: 일제는 1930년대에 중국을 침략하면서 일본 전체를 군대처럼 운영했다. 우리 민족성을 아예 없애려 했고 우리 국민을 자기들 전쟁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나(내선일체)라 하여 한국인도 일본인의 신하(황국신민)이니까 충성을 다하라고 강요했다. 일본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하고 우리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였다.(창씨개명) 자신들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며 마치 신(神)처럼 떠받들게 했다. 아침마다 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게(궁성요배) 했고 학교와 관청의 행사 때마다 일본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다.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황국신민의 학교’라 하여 ‘국민학교’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