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미국의 **'핵심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곧 미국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태도가 바뀐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애치슨 선언의 진정한 의미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12일)은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보장되는 방위선을 설정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알류샨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반도를 이 선에서 제외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상시 주둔시키거나, 북한의 국지적 도발에 직접적으로 군사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태에 무관심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애치슨은 이 선 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유엔(UN)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즉, 지역 내 분쟁 발생 시 유엔을 통한 '집단 안전 보장'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입니다.
2. 북한의 전면 남침과 냉전 체제의 확전 위협
김일성과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을 오판했습니다. 그들은 이 선언을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개입 의사가 없다는 명확한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를 계기로 소련의 승인을 얻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대규모 전면 남침을 단행했습니다.
북한의 전면적인 침략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소련과 공산 진영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봉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북한의 남침은 이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을 돕지 않고 공산화되는 것을 방치했다면, 이는 전 세계에 미국의 봉쇄 정책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주게 되고, 공산주의 세력이 다른 지역으로도 팽창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유엔군 참전 결정 과정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했습니다. 이때 소련이 중국 대표 문제로 회의에 불참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거부권 행사 없이 유엔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1차 결의 (6월 25일): 즉각적인 전투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촉구했습니다.
2차 결의 (6월 27일): 북한군이 1차 결의를 무시하자, 회원국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도록 권고했습니다.
3차 결의 (7월 7일):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를 임명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유엔이라는 국제 기구를 통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단순히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제 평화 수호'**라는 명분을 얻어 전 세계 16개국의 참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을 미국의 핵심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은 군사 전략적 판단이었지만, 북한의 전면 남침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는 냉전 시대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더 큰 위협으로 인식되어 미국이 유엔을 통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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